[신간] 음식으로 되짚은 한 사람의 연대기 『기억의 맛』 출간 할머니의 부엌에서 13세기 몽골 기마민족까지

24개 음식마다 붙은 〈메뉴판 비하인드〉 23편, 각주 123개 『음식디미방』·『호산청일기』 등 1차 문헌 직접 인용

수치심·자책까지 삼킨 자리를 정직하게 적어

신간 기억의 맛 출간


수제비 한 그릇에는 한국전쟁 후 피란민의 시간이 고여 있고, 흔히 사 먹는 햄버거의 기원을 따라가면 13세기 몽골 기마민족이 말안장 밑에 날고기를 넣고 대륙을 호령하던 전쟁사에 닿는다. 손미주의 에세이 『기억의 맛』이 8월 20일 작가의집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부제는 '식탁 위에 쌓이는 시간, 그릇 안에 담기는 역사'로, 스물네 개의 음식을 매개로 사적인 기억과 인류가 축적해온 음식의 역사를 나란히 놓은 236쪽 분량의 에세이다.


출발점은 한 사람의 부엌이다. "먹는 행위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기억법이자, 흘러가는 시간을 새겨넣는 일이다. 나에게 그 수많은 기억의 문을 처음 열어준 사람은 나의 할머니였다." 저자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손은 "지도 같았다"고 묘사된다. 그 손맛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은 훨씬 뒤였다. "두 딸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차린다. 내가 재현해 보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음식들이 단순한 레시피의 조합이 아니었다는 걸. 그건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꾹꾹 눌러 담았던 사랑이었다."


책의 구조는 두 겹이다. 각 꼭지는 저자의 기억으로 시작해, 말미의 〈메뉴판 비하인드〉에서 그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역사로 이어진다. 첫 꼭지 「시작의 맛, 카레」가 전형이다. 자취 첫날의 설렘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서 카레를 접하고 일본이 메이지 시대에 변형해 일제강점기 한반도로 들어온 경로로 옮겨간다. 빼앗긴 쌀밥을 먹은 일본군이 각기병에 걸렸고 그 치료를 위해 카레라이스가 보급됐다는 대목에 이르면 익숙한 한 그릇이 전혀 다르게 읽힌다. 〈메뉴판 비하인드〉는 23편, 각주는 123개다. 숙빈 최씨가 출산 후 하루 일곱 번 미역국을 먹었다는 『호산청일기』 기록, 광해군에게 음식을 바쳐 호조판서에 오른 뒤 '잡채판서'라 비웃음을 샀던 이충의 이야기가 그렇게 나온다.


이 책이 여느 음식 에세이와 갈라지는 지점은 열고 싶지 않았던 기억까지 꺼냈다는 데 있다. 「에이스, 수치심의 맛」이 대표적이다. 바닷가에서 언니들이 밟아 부순 과자를 사촌과 주워 먹다 들킨 어린 날, "쟤네 거지 아니냐?"는 말에 도망치던 장면을 저자는 이렇게 적는다. "침과 함께 버무려진 에이스는 수치심으로 내 몸 어딘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요양원의 할머니를 그린 「맛의 끝자락, 콩잎」, 갈치를 발라주며 사랑의 대물림을 깨닫는 「갈치를 발라주는 시간」도 함께 실렸다.


책이 도달하는 결론은 에필로그에 있다. "먹는다는 건 살아가는 일이고,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과 억울함, 안도, 수치, 외로움까지도 함께 삼키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도 분명해진다. "'많이 묵어라.' 그 한마디 뒤에 얼마나 많은 말이 숨어 있었는지 이제는 안다. 할머니는 어쩌면 음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음식에 대해 쓰는 것으로 할머니의 사랑에 답하고 싶었다." 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기억이 있고 지금은 자기 아이의 밥을 차리는 이들에게 두 겹으로 읽히는 책이다.


작성 2026.08.31 10:54 수정 2026.08.31 10:54
Copyrights ⓒ 피알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박보미기자 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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